아시아의달: 생각노트

지금은 제주 출장 중,

가만히 누워있다가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지배한다'

우리가 보이는 세계로 지음 받았지만 

우리 안에 영이, 우리 안에 신념과 믿음이 결국 우리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옳다는 것에 대하여 죽는 것'을 쿠는 이야기하셨고,

예수쟁이들은 '날마다 죽고 부활을 사는 삶'을 이야기한다. 

어딘가 일맥상통하기도 하고, 그러나 시작과 결론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의지로 죽고, 내 의지로 살겠다 

하나는 나의 의지로 나를 죽이는 것, 나의 생각의 생각(메타인지)를 통해 늘 깨어 알아채고, 내가 살아날때(내가 옳다!!) 내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각을 일깨운다. 끊임없이 나를 깨우고, 나를 돌아보고, 내가 노력하며 산다. 

 

내 의지로 죽고, 예수로 살겠다 

하나는 이도 마찬가지로 나의 의지로 죽는다. 내가 죽고자 하지 않으면 죽을 수 없다(자유의지). 그러나 이 삶은 내가 사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않고(이 필경의 끝을 알기 때문에), 내 힘이 아닌 성령님을 의지하며 산다. 성령을 따라 살기로 내 입술로 고백하고 성령을 내 마음에 영접하면 성령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살수 있도록 중보하시고 말씀과 기도로 함께 해 주신다. 그렇게 나는 죽고 부활하신 예수로 사는 삶을 산다. 

 

내가 죽었다고 할 때 이 죽음은 '무엇'에 대하여 죽음이지 진짜로 죽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삶은 계속되고 내 육신도 잘 살아있다. 여전히 우리의 호흡도 계속되고, 더 생각안하고 그냥 생각 나는대로 행동해버리고 싶고(귀찮고), 나의 옳음을 주장하고 싶고(인정받고 싶고), 육신도 그대로 살아있어 욕심과 편안함(욕구)을 따라 살고 싶은 한 편의 마음이 있다.

 

내가 여전히 살아있는데 죽겠다는 사람 중에 자아를 여전히 내 중심에 두고 죽겠다고 외치는 삶은, 굉장히 괴롭고도 고달픈 삶이 될 수 있다. 이 끝없는 싸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나. 물론 이 괴로움을 철학적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게임하듯 사는 삶을 살겠다는 포부도 멋지지만 나는 그런 삶이 넘어지는 것을 눈 앞에서 보면서 이 끝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물음표가 남았다.

 

반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을 살아보자. 아마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아니면(거짓말이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아마 예수쟁이들일 것이다. 나는 이제껏 나의 신념에 따라, 누가 봐도 예수님을 정말 믿는 사람이구나 하는 그런 삶을 살지는 못했다. 마치 예전 박해당하던 로마시대의 교인들처럼 숨어서 믿는 사람일 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로 사는 삶은, 정말 그렇게 되어지는 삶은, 내가 "주님..." 부르기만 하여도 은혜를 주신다.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혜사를 통해 우리 삶에서 직접 역사하신다. 내가 운전대를 그 분께 넘겨드리기만 하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님께 운전석을 내어 드리고, 긴가민가하는 나의 욕심과 사역의 길 순간순간 마다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기로 결정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결정한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 

내가 얼마나 날마다 쓰러지고, 마음이 하루에도 높아지고 낮아지는 롤러코스터를 경험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 나의 집 문패를 바꾸고, 또 휘몰아칠 이번 한 주간을 주님께 맡기며 잠잠히, 또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러 갑니다.